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망명정부 (문단 편집) == 항전 == 1939년 말에 접어들면서 [[소련군]]과 [[독일 국방군|독일군]]의 추적을 피해 남부의 [[헝가리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으로 탈출한 폴란드군들이 [[자유 폴란드군|속속 폴란드 망명정부 수하로 집결]]되기 시작했다. 폴란드 육군만 해도 10만 가량을 헤아렸으며[* 나중에는 소련에서 석방된 폴란드 포로들과 폴란드 교민들의 입대까지 합쳐서 20만으로 불어난다.] 나치와 소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폴란드 해군의 전함들도 역시 영국으로 집결했다.[* 이렇게 집결한 해군 전력 중에는 폴란드 해안에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에스토니아]]까지 도망쳤다가 거기서 탈출하여 다시 [[영국]]으로 무사히 도망친 [[https://en.wikipedia.org/wiki/ORP_Orze%C5%82_(1938)|오제우]]같은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조직된 자유 폴란드군은 이듬해 봄에 일어난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군 지휘 하에 분투를 벌이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망했어요]]. 프랑스의 몰락 이후 폴란드 망명정부는 [[런던]]으로 이전했다. 영국으로 옮긴 뒤에도 폴란드 망명정부는 독일에 대항하여 영웅적인 항쟁을 계속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영국 공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폴란드인 조종사들이 독일 공군만 보면 어찌나 닥돌을 하고 냉혈한처럼 닥치는 대로 루프트바페 전투기, 폭격기를 격추해 나가니 어떻게든 자국 공군의 피해 규모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영국 왕립 공군이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였다. 거기다 야사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교전상황이 터지면 서툰 영어 대신에 폴란드어가 튀어나왔던지라 의사소통의 문제도 상당히 심각했고 영국인들에게 독일군으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게다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엔 폴란드어나 독일어나 중부유럽 언어 억양이 전반적으로 비슷비슷하게 억세게 들리기도 하고,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 자체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옛 카이저 치하 독일 제국, 프로이센 통치에서 벗어난지 30년도 안 돼서 재점령당한 상황이라 언어정화운동과는 별개로 구어에는 독일어 단어, 영향력도 강해서 외국인들 처음 보는 영국 농촌 농민들에겐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그래도 이들은 폴란드 본토와 프랑스에서 계속된 항공전을 겪은 고참 베테랑 조종사들로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한 연합국 조종사의 5% 정도를 차지했지만 전체 격추 비율의 12%를 차지하며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펼쳤다. 이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비에트 연방과 다시 수교했고 폴란드 침공 당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됐던 폴란드군 포로들은 석방되어 소련군 혹은 자유 폴란드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다시 투쟁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비에트 연방의 관계는 외교 관계 수립 후에도 여전히 개차반이었다. 우선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자리잡은 폴란드인 공산주의자들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면서 폴란드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겠다는 검은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게다가 종전 후 1939년 전쟁 발발 이전의 영토로 복귀할 것을 요구한 폴란드와 달리 스탈린은 [[커즌 선]]을 지키고 싶었던 것도 분쟁의 한 몫을 차지했다.[* 처음부터 단호박으로 거절하진 않았다. 알았다는 답만 한 채로 '일단 나치부터 조지고 돌려줄게'라면서 시간을 끌다가 종전 후에 자기의 따까리인 공산주의 신정부를 세우고는 '1939년의 국경? 그게 뭐임?' 이렇게 [[아몰랑]]을 시전했다. 영국과 미국은 당연히 폴란드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을 격퇴시키는데 엄청난 공헌을 한 소비에트 연방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을 통해 커즌 선을 승인해주고 만다. 그나마 폴란드에게 다행이라면 뺏긴 몫만큼 독일에게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를 가져왔다는 것 정도. 사실 산업 기반 등의 가치로 따지면 얻은 영토 쪽이 훨씬 높기 때문에 국민 감정을 차치하고 보면 손해는 아니다.] 한편 폴란드 망명정부는 1939년의 전쟁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와 병사들을 석방하여 폴란드군을 결성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소련 측에서 벌인 [[카틴 학살|어떤 사건]] 때문에 폴란드군의 장교단이 죄다 날아가서 제대로 된 군대를 꾸릴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좀 더 기후조건이 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동으로 이동, 재정비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몬테카시노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3년 4월 '''[[카틴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의 현장이 노출되자, 소비에트 연방의 소행으로 추정한 폴란드 망명정부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통해서 진상 조사를 촉구하자, 소비에트 연방이 단교를 선언했다. 게다가 진상 조사를 추진한 시코르스키 총리는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며 사망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